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케다 신겐 (문단 편집) === 느슨한 결속력 ===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는 열넷의 어린 나이에 가독을 물려받았으나, 20여년 동안 가주직을 두고 항쟁을 이어온 숙부 아부라카와 노부요시(油川信恵)를 불과 1년만에 패퇴시키며 다케다 종가를 통일하였다. 그 후엔 숙부측에 가담했던 국인중 오야마다 야타로(小山田弥太郎)를 전사시키고, 그 아들 노부아리(信有)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내며 사실상 가이 동부의 네임드 가문 오야마다씨를 굴복시켰다. 이후로도 가이 전역에 흩어진 유력한 국인중이나 가문들을 쉴새없이 정벌하면서, 집권 10년차를 넘어서는 가이 1국을 거의 통일하는 단계에 접어든다.본래 가이의 슈고쇼(守護所) 즉 일종의 치소(治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이사와(石和)였지만 1518년 즈음에 고후(甲府)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다음해엔 고후에 거성 츠츠기가사키 저택(躑躅ヶ崎館)의 건설을 시작하고 성하마을을 정비하며 가신들과 유력 국인중의 거주지를 집단적으로 이주시키는 등, 본격적인 센고쿠 다이묘로 전환하는 동시에 중앙 집권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반독립적인 현상황을 고수하고픈 호족세력들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적지않은 호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신겐이 노부토라를 추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다케다 가문의 가신단은 다케다 가를 절대적인 주가로 모시고 대대로 절대복종하는 봉건주의적 집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케다 신겐이라는 절대적 카리스마를 지닌 수장을 가진 여러 가신 집단의 협력 체제라 할 수 있다. 신겐 역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주요사안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여러 가신들과의 합의를 거쳐야 했다. 때문에 신겐 역시도 호족들의 눈치를 볼 때가 있었고, 신겐이 죽자마자 가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신겐 개인의 카리스마에 통제되던 다케다 가신단은 가문을 배신하거나 이탈하며 산산이 와해된다.[* 비슷한 처지이던 우에스기 겐신의 경우 에치고(越後) 영내에서 국인중이나 가신들의 반란이 시도때도 없이 터져서 이를 정리하느라 국력을 꽤나 낭비했다. 그러나 겐신은 반란을 일으킨 세력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신겐의 경우 아버지대에 워낙 지방의 유력자들을 철저히 밟아놔서 반란에 시달릴 일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다케다 가문을 향한 반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차이는 멸문의 위기상황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겐신 사후 우에스기 가문이 가게가쓰를 중심으로 가신단이 똘똘 뭉치며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가쓰요리 대의 다케다 가문은 그딴거 없이 다들 자기 살길 찾아가는 등 확연히 대비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버지인 노부토라 추방의 건만 해도, 실제로는 신겐이 주도한 쿠데타가 아니라 가신단이 기획하여 주도하고 신겐을 '''옹립'''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을 정도. 그러나 지방 세력으로서의 한계를 타파하지 못하거나 중앙 집권화에 실패하여 몰락하는 것이 신겐이나 다케다 가문만의 문제점은 아니었고, 전국시대 중기~후기에 걸쳐 급격한 세력 확장을 한 다른 모든 다이묘 가문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